영화나 소설, 드라마에서 최면요법은 인상적인 기법으로 활용되는데, 정말 최면요법은 단 한 번의 시도만으로 과거의 모든 기억을 깡그리 지우고 원하는 부분만 남겨놓을 수 있을까.
우리는 오래전부터 기억을 재조작하고 암시를 통해 몸과 마음의 반응을 변화시키고 억제되어 있던 기억을 살려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최면이라고 생각해 왔다.
또 아직까지 최면에 걸리는 이유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지만, 일부 영역에서 최면요법은 적용대상을 분명히 하고, 기대하는 부분을 한정지었을 때에는 그 어떤 약물요법이나 상담요법보다도 짧은 시간 안에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최면요법은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최면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이나 동작 등의 신호를 통하여 반응을 유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최면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아니나, 개념적으로 최면술에 가까운 행위는 기원전 10세기경부터 발견된다.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의 조각에는 아마도 최면을 유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여럿 관찰된다. 의술에 뛰어났던 반인반마(半人半馬) 케이론(Cheiron)이 제자이자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를 최면 상태로 유도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또 기원전 376년 이집트에서 ‘치차 엠 앙크’라는 사람이 최면술을 행했다는 파피루스 문서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최면에 대한 기록은 역사의 물밑에 가라앉아 있다가 1700년대부터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고, 오스트리아 의사 프란츠 안톤 메스머(Franz Anton Mesmer, 1734~1815년)에 의해 근대적 개념의 의술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는 1766년 빈 대학 의대를 졸업하면서 ‘동물 자기술(磁氣術)’로 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클리닉을 열어 큰 성공을 거뒀다. ‘동물 자기술’은 인간의 몸에 있는 자력을 이용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그는 최면술로 환자를 반의식 상태로 유도한 후 특수하게 제작된 자석을 환자의 몸에 대고 강한 암시를 줬다. 그의 최면요법은 난치병 환자들의 증상을 단기간에 호전시키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메스머는 섬망, 복통, 치통과 이통(耳痛), 분노와 짜증, 머리에 피가 몰리는 느낌을 호소하는 프란츨 외스터리네(Franzl Oesterline)라는 27세 여성을 치료한 사례를 발표했다. 그녀의 몸에서 액체가 빠져나가도록 자석을 사용해서 신속히 치료했는데, 자석을 이용해서 결핍된 몸 안의 동물 자기를 보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자석은 하나의 상징적 도구일 뿐이고, 일종의 최면에 의한 비유적 암시를 준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이론에 의한 치료법은 주류 의학계의 반발을 샀고, 대중들은 그가 ‘기적’을 행했다고 믿었다. 결국 그는 종교계의 공격 대상이 되어 수세에 몰렸고, 파리의사협회가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자 그의 치료법은 빠른 속도로 쇠퇴했다. 그러나 최면술을 ‘mesmerism’이라 부를 정도로 그의 영향은 지금도 남아 있다.
영국 의사 제임스 브레이드(James Braid, 1795~1860년)는 메스머의 동물 자기술에는 회의를 품었지만, 최면이 인간의 생리적인 무언가를 자극하여 일어난다고 생각하여 빛을 내는 물건이나 벽의 한 점을 응시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는 ‘응시법’이라 하고 지금도 최면술의 도입부에서 사용되며, [올드보이]에서 최면술사가 오대수에게 나무의 한 점을 보라고 한 것이 바로 이 기법에 해당된다. 최면술사가 끈이 달린 회중시계를 좌우로 흔들면서 시계를 바라보라고 지시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브레이드는 한 곳만 뚫어지게 보면 시신경이 피로해지고 최면이 유도된다는 가설을 세웠고, 그리스 신화 속 ‘잠의 신’ 히프노스(hypnos)에서 따와 최면술을 ‘hypnosis’로 명명했으며, 1843년에는 첫 번째 최면요법 책인 『최면신경학(Neurohypnology or rationale of nervous sleep)』을 출간했다.
뚜렷하게 효과적인 마취제가 개발되기 전이었던 당시에 최면술은 가장 효과적인 수술 전 마취법이었다. 1864년 산화질소가 본격적으로 마취제로 도입되면서 최면은 점차 사라졌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최면이 소개되면서 더욱 광범위한 응용과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예일 대학의 클라크 헐(Clark Hull, 1884~1952년)이 펴낸 『최면과 피암시성(Hypnosis and suggestibility)』은 그동안의 실험심리의 연구결과를 포함한 최면 연구를 집대성하여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헐은 지금까지도 진행 중인 ‘상태/비상태(state/non-state)’ 논쟁의 불씨를 던진 것으로 유명하다. ‘상태(state)’ 이론은 최면으로 인해 멍하고 몽롱한 상태인 트랜스 상태는 의식의 특별한 상태로 일상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비상태(non-state)’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그런 특별한 상황이란 없으며 모든 최면 현상은 사실 인간의 일상 심리 기제로 설명이 가능한 것이라고 보편화해서 보려고 한다.
1955년 영국의학협회, 1958년 미국의학협회는 장기간의 검토와 조사 끝에 최면요법의 유용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이에 정규 커리큘럼에 포함시킬 가치가 있어 각 전문 분야에서 보조적 치료기법의 하나로 사용할 만큼 충분히 의미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헐이 학술적인 측면에서 최면을 입증하는 데 노력했다면 데이브 엘먼(Dave Elman, 1900~1967년)은 최면요법을 치료기법으로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현대화했다.
엘먼은 젊은 시절부터 최면을 배워 적극적으로 시도하여 ‘세계에서 가장 젊고 빠른 최면요법사’로 불렸고, 1964년 펴낸 『최면요법(Hypnotherapy)』은 지금도 고전으로 여겨진다. 엘먼의 기법은 ‘당신은 이제 졸리기 시작합니다’와 같은 작은 주문 하나로도 바로 최면에 의한 트랜스로 들어가게 할 수 있어서 각광받았다.
이때부터 최면은 의학의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좀더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 의사가 아닌 사람들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범죄수사에 이용하거나 환자 본인이 직접 배워서 시행하는 ‘자동암시(autosuggestion)’ 같은 기법들도 개발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최면에 대한 공포, 즉 나도 모르는 사이에 최면에 걸려 타인의 꼭두각시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대중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최면을 건다고 해도 반드시 개인의 자발적인 면이 개입해야만 최면 상태가 만들어질 수 있다. 최면에 대한 기대치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도 모르게 최면에 걸리는 일은 드물다.
실제로 최면에 잘 걸리는 성향의 사람이 있는데, 대개 이들은 ‘최면감수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기억력이나 상상력이 풍부하고, 몰입과 집중력이 좋으며, 최면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지를 묻는 십여 항목의 최면감수성 검사를 통해 최면감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 정면을 응시한 상태에 눈동자만 위로 올려서 얼마나 많이 올라가는지 여부로 보는 ‘eye-roll sign’이나 양손 깍지 끼기 검사와 같은 신체반응 검사가 있는데, 정확히 어떤 메커니즘을 반영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상당히 정확히 최면감수성을 측정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몇 가지 자기훈련을 통해서 최면감수성을 향상시킬 수도 있다.
최근 의학영역에서는 최면요법을 활용한 치료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공포증상의 경우, 최면요법으로 공포를 덜 인식하게 암시를 주는 요법이 효과적이기도 하다. <ⓒ Becket01>
1970년대에는 데이비드 스피겔(David Spiegel)이 최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최면을 외부세계의 인식이 줄어든 상태에서 좁은 영역에 정신집중과 몰입을 강하게 한 상태로 파악했다. 사람은 주변 인식과 초점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 두 가지는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항상 동시에 존재한다.
그러다가 일시적으로 주의가 한 곳에 집중되면, 즉 초점 인식이 증가하면, 상대적으로 자연히 주변의 일들은 잊혀진다. 그 역시 일상생활에 인간의 기본적 정신상태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의 일시적 변형으로 보았던 것이다.
1980년대 이후 뇌과학과 영상학이 발달하면서 최면현상이 뇌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 입증되기 시작했다. 2000년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진은 흑백사진을 보여주면서 “이것은 컬러사진”이라고 암시를 주자 실제로 뇌의 색채를 인식하는 부분이 활성화되는 것을 밝혀 《미국정신의학회지(American Journal of Psychiatry)》에 발표했다. 또한 최면이 특이한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내지만, 이는 실제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자연스러운 의식 현상의 일부라는 것도 점점 밝혀지고 있다.
한편으로 의학영역밖에서는 범죄수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처음 도입되기 시작해서, 1978년부터 미국연방수사국등에서 요원들에게 최면을 교육해서 실무에 활용했다. 한국에서도 1970년대에 일부 최면을 수사에 활용한 사례가 있고, 1990년대이후 본격적으로 도입해서 현재 전국에 약 50명의 최면수사관이 범죄사건 수사에 최면을 활용하고 있다. 범인의 인상착의를 기억해내 몽타쥬를 작성하거나, 뺑소니 차량의 번호판을 기억해내는 것에 이용을 하는데, 여기서 기억해 낸 것이 비록 정식 증거로 채택되는 것은 아니나 수사방향을 잡는데에는 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처음에는 매우 신비스러운 주술이나, 히스테리 환자에게서 보여지는 신경증적 증상이 최면이라고 보는 견해, 또는 암시로 사람을 조정하거나 기억을 지우는 퍼포먼스적인 비기(秘技)로 보는 것, 의학적 보조치료방법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들이 다양하게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최면요법의 흐름은 이전에 비해 대중화하고 있으며, 최면요법만 전문으로 하는 전문가들이 늘어나면서 특정한 적응증에 대해서는 매우 효과적이고 빠른 치료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사람들은 “레드선!”으로 어떤 행동을 하도록 암시를 주거나, 잊고 있던 무서운 기억을 소환하는 것을 최면술로 인식한다. 그러나, 의학영역에서는 예를 들어 높은 곳을 올라갈 수 없는 고소공포증과 같이 특정한 상황이나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강한 공포증상에 경우, 최면요법으로 공포를 덜 인식하게 암시를 주는 요법이 매우 효과적이다. 또 최면으로 마취를 하고 수술을 하는 사례가 외국에서 보고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효과가 분명하다고 알려진 몇 가지 적응증에 대해서는 최면술을 가장 효과적이고 먼저 시도해볼 수 있는 치료기법의 하나로 여겨진다.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였던 프로이트는 당대 세계 최고의 최면전문가였던 프랑스의 신경생리학자 샤르꼬로부터 최면을 배운 후 최면 연구와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라고 불리는 감정정화법의 치료적 가치, 무의식의 존재와 그것의 병리학적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는 최면을 버리고 정신분석 위주의 심리치료의 선구자가 되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최면에 능숙하지 못했거나 치료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등등 설이 분분합니다.
헐은 예일 대학 심리학 교수였는데 1930년대 초부터 최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10여년간 최면에 대한 실험을 전개하여 최면과학 성립에 기여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표준화되고 객관적인 실험절차에 의한 최면실험 전통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1949년 미국심리학회의 회장을 역임하였고 스탠포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로서 탁월한 업적을 쌓은 그는 1957년 정신과의사인 부인 조세핀과 최면연구에 몰두해 수백편의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였습니다.
헐의 제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에릭슨의 최면은 간접최면법(indirect hypnosis)로 알려지면서 직접적이며 지시적인 전통적 최면과는 대조적인 한 분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의 접근은 주로 제자인 헤일리를 중심으로 캘리포니아의 팔로 알토 그룹, 의사소통 이론을 중심으로 한 가족치료, 전략적 치료와 해결중심 치료분야에 계승되었습니다. 에릭슨 이론은 구니슨과 오타니 등이 심리치료의 원리와 기법으로 적용하고 활용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의 이론은 밴틀러와 그라인더의 신경언어 프로그래밍 즉 NLP 체계의 기초가 되기도 하여 NLP가 성립하고 발전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면요법의 역사 -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을 다 지울 수는 없을까? (정신의학의 탄생, 2016.01.15, 하지현)